농촌의 삶: 고탄 방문기

2008. 9. 20. 10:46내가 사랑한 시간

호닮, 고탄 방문기: 농촌의 삶

생계를 위해 육신과 정신의 마지막 기름 한방울까지 짜내느라 문화고 여유고 다락방의 헌책만큼이나 소원하게 여겼던 우리들이 이름도 없는 모임을 결성한지 어느덧 7개월째인 듯 하다. 처음 우리는 이름을 갖고있지 않았다. 모임을 명명하자는 제안에 선뜻 '나는 이 이름이 좋소' 라고 되받아치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모든 사물은 이름을 지니고 그 이름으로 호명됨으로써 사회의 의미있는 일원이 되는 것일진데, 우리는 이름 짓자는 말만 했지 별 의미있는 제안을 내놓지 못했고, 한동안 세상에 알릴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어쩌면 이름을 짓는다는 건 저녁 메뉴를 결정하는 것만큼 어렵고 피하고 싶은 일일지도 모른다. 뭐 먹을까라는 물음에 뒷짐지고 있다가도 짜장면 먹자는 말에 밀가루가 안좋네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는 일이 허다하니 말이다. 그러니 '도서관 이름을 어떻게 정하셨나요?'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뒤뚜르로 지었는데' 라고 너무도 간단히 말해버렸던 시민연대 활동가님을 보며 속으로 참으로 기막혀 하며 놀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쨓든 우리는 이 사회적 지형에 의미있는 행위자로서 자신을 끼워넣을 이름을 정했다. 사실 단 하루만에 너무도 일사불란하게 결정지을 수 있었던 건 두번의 공연을 통해 느끼게 된 어색함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공연을 의뢰하거나 우리의 공연을 보고 뭔가 말하려 했던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름을 물어왔다. 그럴 때마다 아직 모임의 이름이 없고, 왜 정하지 못했으며, 이 상태가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앞으로 정해질 것이라는 다소 장황한 변명아닌 변명을 되풀이했다. 남들에게 의미있는 타자가 되고자 하는 자각과 그렇지 못한 현실간의 어색함은 서둘러 모임의 이름을 결정봐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압박으로 우리 모두의 내부에서 작동했던 것 같다.

고탄 출발 전 연습실 앞에서


두번의 공연을 마치고서야 우리는 '호수를 닮은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고탄으로 향했다. 고탄 공연은 한달 전 쯤 고탄 이장님과 마을 아버지들의 방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불시에 방문하신 이 분들의 말씀을 정리하자면, 마을 주민들이 운영중인 별빛공부방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를 알리기 위해 조촐한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 조촐함의 한 꼭지를 맡아달라는 것. 자신의 자식들과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려는 고탄 아버지들의 맑은 정신에 감탄하며 우리는 다가올 농촌의 밤을 준비했다. 

공연을 통해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었던 건 마을 사람들이 준비한 것들을 나 또한 청중의 입장에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아빠들, 그리고 어느 할아버지는 무대에서 우리에게 경탄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별빛공부방 산골 가족음악회'는 이렇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여하는 잔치여서 기뻣고, 이 의미있는 작업에 동참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준비를 하면서 만난 고탄의 젊은 아버지들 중에는 귀농하신 분들이 많다. 나는 이분들이 어떤 이유로 귀농의 길로 들어섰는지 알지 못한다. 귀농이 이분들에게는 각박한 생계의 고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는지 물질문명 속에서의 생의 존재의미에 대한 고민의 결과였는지 알지 못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이분들은 농촌으로 흙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존의 조건 자체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을 비인간적이고 반생명적으로 만드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음을, 그 속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심각하게 병들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의 결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들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함께 했던 잠깐의 시간 속에서 간간히 터져나오는 농생의 고난한 현실적 조건들이 농촌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쉽게만 생각했던 나 자신에게 '네 부끄러움을 알라' 고하는 자극과 반성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같은 사람에게 농촌에서의 삶이란 시골가서 한적한 삶을 즐기는 것일 뿐이다. 시골에 집 한채 장만해서 텃밭도 짓고, 저녁마다 밥짓는 냄새 맡아가며 사는 것. 그 옆에 맑은 개울이라도 흐른다면 더 없이 좋을 그런 것이다. 도시를 떠난다는 것, 삶의 터전으로써 농촌을 택한다는 것을 텃밭 가꾸고 사는 것 쯤으로 쉽게 생각했던 자신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현대 물질문명의 죄악스러움과 우리가 저질러놓은 생태파괴를 비난하면서 농촌의 중요성을 외치고, 때로는 삶의 고단함에 지쳐 섣불리 농촌에서의 삶을 동경했던 우리는 정작 농생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없었음을 고백해야만 한다.

우리의 별 고민 없는 상상과 동경은 농촌에 대한 위험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텃밭 가꾸고 밥짓는 냄새 솔솔 맡아가며 사는 농촌의 삶이라는 이미지 속에는 경제, 교육, 생활인프라와 같은 구체적 조건에 대한 고민들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한심한 상상 속에서 농촌을 기형화하지는 않았을테지만, 나같은 한심한 인사들이 심심치 않게 있다는 걸 발견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때문에 이런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위험한 상상 속에서와는 다르게, 농촌의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그러한 문제는 생의 한 조건으로 맞닿아 있는 것이다. 고탄의 아저씨들은 밥먹고 살기위해 농산물의 판로를 개척하고 자녀 교육을 위해 폐교를 막는 운동을 벌인다. 자녀 공부방 한칸을 얻기위해 관료들을 상대로 투쟁하며, 마을의 경제적 이익과 좀 더 가치있는 발전 사이에서 서로 갈등하고 설득한다. 또 자녀와 배우자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음악회를 준비한다.

같이 준비했던 고탄의 젊은 아버지들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 기여했다는 마음에 기쁘다. 산골 가족음악회에 또 다시 참여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고탄 아버지들의 가치와 소망들이 실현되기를 소망한다. 서둘러 떠나는 우리에게 삶은 옥수수를 한보따리 쥐어주시던 정깊음 또한 지속되어 각박한 생활에 지쳐 배려란 걸 모르는 나같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사랑한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5.10. 부귀리.  (0) 2020.05.16